죽음
나는 그때의 떨림을 아직도 기억한다. 비행기에 올라 비행기가 이륙해서 착륙할 때까지 나의 심장이 쿵쿵대던 그때의 느낌. 묘한 흥분과 기대감, 어떤 낯선 희망이 나를 흥분시켰다.
그곳은 인도 India였다. 인도.
흥분과 기대가 뒤섞이긴 했으나 역설적이게도 나의 인도 여행은 죽음을 맞이하기 위한 것이었다. 사람들에게는 수행을 하러 간다고 했지만 내심으로는 일종의 사바에 대한 작별을 고하기 위해서였다.
당시 나는 근 10년 동안 깨달음을 얻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그리고 10년이 되어도 깨달음을 얻지 못한다면 나는 더 이상 삶을 이어나갈 가치가 없다고 생각했다. 20대의 나에게 ‘깨달음’은 풀어야 할 화두였고, 깨달음의 근처에도 가지 못한 나는 ‘죽음’을 핑계로 인도로 간 것이다. 내게 20대는 젊음의 희망이나 도전 또는 패기와 열망이 아닌 깨달음의 구름에 가려진 잿빛 하늘 같은 그런 날들이었다.
그래서였을까? 비행기를 타고 가는 중간에도, 그리고 비행기에서 내리는 순간까지 나의 가슴은 미묘하게 쿵쿵거리며 울리고 있었다. ‘나는 이곳에서 삶을 마감하리라’는 모종의 결심과 고타마 붓다가 태어나고, 깨달음을 얻고, 교화를 펼치고, 열반에 들었던 인도에 대한 묘한 호기심이 어우러진 채 인도에 도착했다.
그러나 인도에 도착해서 벌어진 일은 나의 예상과 완전히 빗나갔다. 결과적으로 나는 멋진 무명의 죽음을 이룬 것이 아니라 살기 위해 발버둥 친 꼴이 되었다.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나는 인도인들에게 등을 떠밀리듯 이리저리 물결치며 인도 전역을 돌아다니게 되었다. 돈이 거의 없어 최소한의 경비로 먹고 자야 했기에 몸은 야위어 갔지만 마치 죽을 곳이 인도의 어딘가에 있기라도 한 것처럼 그렇게 정처 없이 떠돌았다. 여행의 낭만과 사색은 내게 사치처럼 느껴졌고 이 삶의 마침표가 언제든지 찍어지면 좋겠다는 체념과 죽음에 대한 갈망이 나를 사로잡았다. 결국 나는 인도에서 죽음과 가장 가깝다고 할 수 있는 바라나시의 갠지스강으로 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보름 정도 머물며 인도인들의 죽음을 지켜보았다. 날마다 화장터에 있는 탑으로 올라가 시신이 들어오고, 태워지는 것을 보면서 나도 저렇게 될 것이라고 관조했다. 그리고 화장터 근처의 강가에서 짜이를 마시며 하염없이 흐르는 갠지스강을 보면서 죽음을 생각했다. 그러다 문득, 내가 원하는 방식의 죽음 또는 내가 생각하는 죽음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마음속에서 불현듯 생존에 대한 갈망이, 죽음보다는 살고자 하는 열망이 생겨나옴을 직감했다.
‘그래, 나는 죽기 위해서 인도에 온 것이 아니라 어찌 보면 살기 위해 인도에 온 것이다. 죽음에 초연한 인도인들은 없다. 우리 모두는 살고자 한다. 아직 서른도 안 된 내가 죽음을 생각하는 것은 얼마나 사치스러운가! 나는 조금 더 살아야겠다. 내가 갈구했던 깨달음은 어쩌면 환상인지 모른다. 내가 생각하는 그러한 방식의 깨달음은 없다. 인도의 성자들이나 중국의 선사들이 말하는 깨달음은 지금의 나와 아무런 관련이 없다. 그럼 내게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당시 나는 관조된 죽음은 진정한 죽음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렇다면 죽음을 열망하는 것은 죽지 않으려는 욕망의 투사가 아닐까? 죽음은 다가올 수는 있어도 쫓아갈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나는 죽음을 맞이하기 위한 여행이 아닌 삶을 살기 위한 여행을 해보기로 결심했다. 그렇게 다시 인도에서의 '삶의 여행'이 시작되었다.
지금 20여 년 전의 이러한 나를 돌아보면 많이 부끄럽다. 당시 나는 깨달음이 내 안에서 일어나는 어떤 체험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깨달음이라는 것이 노력하면 되는, 추구하면 이루어지는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노력과 추구 자체가 깨달음을 가리는 장막이라면 그러한 깨달음은 영원히 도달할 수 없을 것이다. 또한 내가 생각하는 특정한 체험으로서의 깨달음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진정한 깨달음일 수 없다. 왜냐하면 그것을 해석하는 주체로서의 내가 여전히 존재하기 때문이다. 또한 내가 원하는 대로의 ‘깨달음’을 얻지 못한다고 해서 죽음을 택하는 것이 과연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지도 알게 되었다. 만약 어떤 특정 깨달음이 존재한다고 해도 나처럼 어리석은 사람에게, 깨달음과 죽음을 동급으로 취급하려는 사람에게 찾아오지는 않을 것이다.
지금 돌이켜보면 당시 나의 죽음에 대한 갈구는 일종의 분노였는지도 모르겠다. 죽음의 대가로 깨달음을 원하는 것은 깨달음을 절대적으로 생각하는 일종의 집착일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깨달음 갈망병’이라고 이름 붙여도 좋을 것이다.
어떤 종교적 깨달음이 있다고 해도 그것은 갈구나 집착에 대한 보상이 아님은 자명하다. 특히 깨달음은 그러한 이기적인 태도로 이루어질 수 없으리라. 반대로 깨달음은 그것에 대한 추구가 모두 사라지고, 그것을 더 이상 의식하지 않을 때 문득 다가오는 것이리라. 깨달음을 갈구하지 않는 그런 마음, 영원을 갈구하지 않는 그런 마음, 어떤 이상을 세우지 않고 자신을 그대로 세계에 개방하는 그런 태도가 깨달음이 아닐까 한다.
죽음과 깨달음에 공통점이 있다면 찾거나 갈구할 수 없다는 것에 있지 않을까? 이러한 역설은 죽음보다 삶이, 깨달음보다 지금의 삶이 더욱 가치 있음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죽음의 순간까지 우리에게 다가오지 않는 죽음은 역설적으로 우리가 살아있음을 증명한다. 그리고 우리가 살아있다는 것은 죽기 위한 것이 아니라 죽음을 넘어서는 무엇을 깨닫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죽음은 '가질 수 없는 선물'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