싸움 그리고 카레
나의 인도 여행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나는 크게 네 가지 원칙을 세웠는데 첫째는 매일 아침 오줌을 마시는 것이고, 둘째는 채식을 실천하는 것이며, 셋째는 화두를 놓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넷째는 4대 성지인 룸비니, 보드 가야, 사르나트, 쿠시나가르를 순례하는 것이다. 어차피 더 이상 죽음에 대하여 고민하지 않기로 했기에 인도에서의 시간을 최대한 활용하여 수행의 기회로 삼기로 하였다. 돈이 거의 없어 가장 싼 숙소에 묵었으며, 주로 먹은 것은 바나나와 인도인들이 즐겨 먹는 차파티 등이었다. 기차를 탈 때는 가격이 싼 3등 칸 기차를 탔다. 기차에서 잠을 잘 때 인도인들이 신발을 벗겨간다는 이야기를 듣고 신발은 벗어 가슴에 두었다. 짐가방은 열쇠로 채워 인도인들이 훔쳐가지 못하도록 늘 주의를 기울였다. 인도에서는 한시도 방심할 틈이 없었기에 저절로 수행이 되는 기분이 들었다. 생노병사, 삶과 죽음, 병과 가난을 도처에서 목도할 수 있었기에 화두도 저절로 들려지는 기분이었다.
어느 날, 나는 장거리 인도 기차를 타기 위해 역으로 갔다. 기차는 아무리 기다려도 오지 않았고, 거의 포기할 때쯤 느릿느릿 도착했다. 기차를 향해 사람들이 몰려들었고 나도 등에 배낭을 단단히 둘러메고 필사적으로 기차에 올랐다. 기차 안은 이미 아수라장이었다. 사람들이 끊임없이 밀려들고 밀려나가는 그때, 갑자기 기차의 전등이 꺼졌다. 어둠속에서 알 수 없는 소음과 사람들의 외침 등이 더욱 크게 들렸다. 순간 밀려오는 사람들 속에서 무엇인가 나의 가슴을 더듬고 지나가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갑자기 불이 켜졌고 나는 내쪽을 쳐다보며 여유만만하게 웃고 있는 한 인도인과 눈이 마주쳤다. 갑자기 꺼졌다 켜진 불빛 속에 나는 그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는 알 수 없는 미묘한 미소로 나를 지나쳤고 나는 사람들의 떠밀림 속에서 겨우 자리를 찾아 앉았다. 짐을 내려놓고 옷 안쪽에 넣어둔 지갑을 확인 했다. 지갑이 사라졌다.
나는 앞이 캄캄해지며 더 깊숙이 숨겨둔 여권과 돈을 확인했다. 다행히 무사했지만, 여행을 위해 꺼내둔 지갑과 돈은 모두 사라졌다. 방금 전 나의 몸을 더듬던 그 인도인의 얼굴이 번뜩 떠올랐다. 나는 옆에 앉아있던 인도인에게 지갑을 잃어버렸다고 말했고, 그 인도인을 찾기 위해 한 사람 한 사람의 얼굴을 확인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그와 마주쳤다. 나는 그에게 혹시 지갑을 보지 못했는지 조금 떨리는 목소리로 정중히 물었다. 그러자 그는 갑자기 크게 웃기 시작했고, 나는 그 모습에 화가 나서 다시 큰 소리로 따졌다. 그러자 그가 벌떡 일어나 나의 멱살을 잡고 밀치려고 했을 때, 나는 그의 손목을 밑으로 꺾었다. 고꾸라진 그가 뭐라고 크게 소리를 지르자 갑자기 앞뒤로 앉아 있던 인도인들 십여 명이 모두 일어나 내게 삿대질을 하면서 에워싸기 시작했다. 본능적으로 나는 사람들을 밀치고 아직 출발 전인 기차 밖으로 나갔다. 그러자 열 명 가까이 되는 인도 남자들이 험한 얼굴로 나를 에워싸며 돌진해왔다. 나는 방어자세를 취하며 태권도를 하듯 주먹을 꽉 쥐고 벼르고 있었는데, 그 순간 호루라기 소리가 들리며 몸이 건장하고 배가 나온 인도 경찰 2명이 뛰어왔다. 나는 구세주라도 만난 것처럼 그들에게 지갑을 잃어버렸고, 이들이 지갑을 가져간 것 같으니 찾아달라고 애원했다. 그러나 그들은 지금은 그럴 시간이 없고 기차가 바로 출발해야 하니 일단 신원을 알려주면 나중에 연락하겠다는 등의 말을 하고 나를 위협했던 사람들에게 큰 소리로 주의를 주고 가버렸다. 기차가 곧 출발하기 시작하자 사람들은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이 원래의 자리로 돌아갔다. 나를 위협했던 사람들, 나와 그들을 구경하던 수많은 사람들이 정말로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이 기차로 올라탔다. 나 역시 알 수 없는 불안감 속에서 자리로 돌아갔다.
자리로 돌아온 나는 갑자기 이 모두가 허무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다시 나를 위협했던 사람들이 다시 찾아오지 않을지, 다시 그들을 마주치면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는 불안함 속에 눈을 감고 있었다. 그러자 갑자기 눈에서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어떤 서러움 그리고 고독이 뼛속까지 사무쳤다. 아니 어떤 외로움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그동안 인도인들과 똑같이 손으로 밥을 먹으며 죽음을 찾아다녔는데, 이제 내게 남은 것은 여행밖에 없을 터인데... 진한 고독감과 괴로움 그리고 불안이 엄습했다. 그때였다. 옆에 앉아 있던 얼굴이 동글동글하고 선한 눈을 하고 있던 한 중년의 인도 아저씨가 내게 둥그런 스테인리스 통에 담긴 카레와 다 식은 난을 내밀었다. 그는 밖에서 일어나는 상황을 모두 지켜보았으며 내가 정말 용감하다고 엄지를 세우며 나를 칭찬했다. 그리고 카레를 먹으라고 따뜻하게 말했다. 나는 그 카레의 맛을 기억하지 못한다. 그저 눈물 속에서 그가 건넨 정체 모를 맛의 카레를 먹었던 기억 밖에 없다.
눈물의 카레를 먹고, 다시 눈을 감고 생각했다. 그 인도인들이 다시 쫓아올 수도 있으니 아무 곳에서나 내리자. 모든 사람들이 잠든 새벽쯤 아무 곳에서나 내리자... 그리고 사람들이 하나 둘 잠들기 시작했을 때, 기차가 멈춰 선 곳에, 어딘지로 모르는 기차역에 그냥 내렸다. 이렇게 내리면 더 이상 인도인들과의 시비도 생길 일이 없을 것 같았다. 그런데 기차에 내리자 생전 처음 보는 낯선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귀에서 들리는 작은 웅성거림과 어두운 곳에 있는 정체 모를 것들이... 그리고 가까이 다가가자 알게 되었다. 그것이 사람들이라는 것을. 이름 모를 기차역 바닥에 사람들이 잠을 자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개들과 함께...
생전 처음 보는 낯선 광경에 나는 할 말을 잊었다. 그리고 ‘아, 인간은 왜 이리 괴로운가! 우리의 삶은 무엇인가! 이들은 왜 차디찬 기차역의 바닥에서 잠을 잘 수밖에 없는가!’ 등의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나는 꿈속에서 무엇인가에 홀리듯 잠든 사람들을 헤치며 어떤 생사의 헤맴 속에서 길을 잃은 듯 그들을 뚫고 지나갔다.
역무원을 깨워 기차역에 있는 숙소에 짐을 풀고 누웠다. 그러나 찬 바닥에서 잠을 자는 사람들을 생각하니 잠을 잘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들과 내가 별로 다르지 않다는 것을 불현듯 알게 되었다. 사람들의 슬픔이, 사람들의 아픔이 파도 소리처럼 멀리서 밀려왔다 밀려가듯 느껴졌다. 인도에서는 정말로 가난한 사람들이, 병든 사람들이 늘 눈에 들어왔다. 또한 이 세상에 살지만 이 세상 사람 같지 않은 해탈한 눈빛과 표정을 가진 사람들도 종종 목격할 수 있었다. 나는 삶의 고통과 어떤 초월 사이, 죽음과 생존 사이 어딘가에서 정말로 가난하게 다시 여행을 시작했다. 나는 살기 위해, 잘 살기 위해 여행을 지속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