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미얀마에서 값진 수행의 경험을 했다. 알아차림은 내 삶의 중심이 되었다. 잠자는 시간을 제외하고 몸과 마음에 대하여 알아차림을 유지했다. 무상, 고, 무아는 더 이상 관념이 아닌 체험으로 다가왔다. 미얀마에서 집중적인 수행을 통해 크게 세 가지가 선명해졌다. 첫째, 몸은 고통의 덩어리이다. 둘째, 모든 것은 조건을 통해 일어난다. 셋째, 몸이라는 거친 관찰 대상 이외에 미세한 마음작용이 우리의 삶에 영향을 준다.
수행이 향상되면서 약간의 잠을 자는 시간을 제외하고 알아차림을 유지할 수 있었다. 아침에 자명종 소리를 들을 때, 또 눈을 뜰 때에도 알아차림이 지속되었다. 더 나아가 이러한 행위도 그냥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어떤 마음의 의도에 의해 일어난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이렇게 보면 우리 인간의 삶이란 의식적 무의식적인 의도에 의해 조건지어진 것이다. 특히 몸이라는 거친 관찰 대상에서 마음이라는 미세한 대상으로 관찰 대상이 변하면서 마음이 이전의 행위와 생각 그리고 의도 등에 영향을 받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우리의 마음은 과거의 경험에 의해 조건 지어진 것이다. 관찰의 힘이 커질수록 과거에 생각하고 말하고 행위 했던 어떤 흔적들이 남아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마음 속에 남아 있던 거의 잊었던 기억들을 살펴볼 수 있었다. 여렸을 때 고추잠자리를 수십 마리 잡아서 철제 책상 서랍에 넣었다가 며칠 지나 거의 미이라 상태로 꺼냈던 기억, 나풀거리는 호랑나리를 잡아 방학 숙제로 표본을 만들던 기억, 개구리를 잡아 뒷다리를 구워먹던 기억 등 모든 행위의 흔적들이 일어나고 사라짐을 관찰했다. 당시 이러한 미세한 번뇌들이 해결되지 않으면 더 이상 수행에 진전이 없을 것 같은 느낌에 사로잡혔다. 몸의 느낌을 관찰하면 그것이 어떤 느낌이든 바로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것을 알 수 있었지만, 무엇인가 미세한 마음의 흔적들은 쉽게 해결될 것 같지 않았다. 그러나 수행은 거기까지였다. 인도의 비자가 만기가 됨을 알려오고 있었고, 캘커타에서 출발하는 귀국행 비행기의 날짜가 다가오고 있었다. 당시 함께 수행했던 스님들은 몹시 아쉬워했다. 몇 달만 더 있으면 좋은 수행의 결과를 이룰 수 있을 것 같다고, 비자는 어떻게든 연장이 가능하니 조금 더 있으라는 권유가 있었지만 나는 왜인지 하다만 숙제가 캘커타에 있는 것 같은 느낌과 인도 여행을 마무리하고 싶어 결국 캘커타로 돌아갔다.
미얀마에서 몇 달간 집중적인 수행을 마치고 몸과 마음이 한껏 고무된 상태로 캘커타로 돌아왔다. 그리고 예전의 도미토리에서 숙박을 하였고, 해탈한 사람처럼 캘커타의 거리를 알아차림을 유지하며 돌아다녔다. 그게 전부였다. 그런데 예전의 빨리 걷던 인도인이 내게 다가오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그는 나의 걸음에 보조를 맞추며 놀랍게도 내 귀에 나지막이 속삭였다. “아이 노 유우(I Know You)!”
나는 갑자기 정신이 화들짝 깨어나는 것 같았다. 왜냐하면 당시 나는 모자를 쓰고 있었고, 복장도 달라졌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는 나를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다가와서 아는 체를 하고 빨리 걸으며 사라진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나에게 ‘아이 노 유우’라는 말이 각인처럼 깊이 파고 들었다. 당시 나는 미얀마에서 집중적인 수행을 통해 몸과 마음의 속성에 대한 깊은 체험을 하였다. 그리고 알아차림을 통해 번뇌가 들어올 틈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 ‘아이 노 유우’라는 말은 무슨 이유인지 내게 화두처럼 떨어지지 않았다. 90년대 말, 20여년이 지났음에도 그의 ‘아이 노 유우’는 여전히 내 마음 속에 살아있다. 그러면 무슨 이유로 그의 ‘아이 노 유우!’는 내게 화두가 되었을까? 가만히 돌이켜 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