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 공짜는 없다
대만에서의 공부는 순조로웠다. 나는 좋은 성적을 받으며 공부했고 성적 장학금까지 받을 수 있었다. 밤마다 도서관에서 공부를 하다 학교 운동장으로 나와 태극권도 하고 달리기도 했다. 날마다 학교 운동장을 온 몸이 땀에 젖을 때까지 달리고 힘들면 운동장에 누워 하늘을 보기도 했다. 당시 내게 학교는 놀이터와 학업을 모두 해낼 수 있는 그런 공간이었다. 나는 불교학 강의를 들을 수 있는 동아리와 차를 마시는 동아리에도 가입했다. 그리고 당시 대만에서 유행했던 소걀 린포체가 쓴 『티베트 사자의 서』를 가지고 공부하는 강독회에도 참여했다. 이 책과 별도로 책의 내용을 중국어로 녹음한 오디오 테이프를 잠잘 때마다 들었다.
학교 생활은 그렇게 흘러 어느덧 3학년이 되었다. 나는 철학과 관련된 내용 뿐 아니라 당시 대만의 불학에도 관심을 가졌지만 내심으로는 큰 흥미를 느끼지는 못했다. 여전히 나의 마음은 궁극적인 데 가 있었고 그것은 어떤 결정적인 체험만을 통해서 접근 가능한 영역이 불교의 정수라고 생각했다. 특히 관념적인 철학을 삶으로 통합하는 것은 또 다른 과제처럼 보였다. 철학과의 몇몇 교수들 가운데에는 복장이 특이하거나 생각이 특이한 경우도 많았다. 특히 신화를 주제로 강의했던 교수는 수업을 시작할 때부터 끝날 때까지 판서를 하며 강의를 했다. 칠판의 왼쪽부터 오른쪽까지 분필로 빽빽하게 채워가며 판서를 하고 칠판이 다 채워질 때 얼른 칠판을 지우고 또 써내려갔다. 문제는 그 교수가 강의를 할 때는 학생들의 얼굴을 보는 것이 아니라 칠판을 보며 강의를 했다는 것이다. 그는 칠판과 강의를 했다. 그런데 더욱 재미있는 것은 그의 강의가 인기가 많았다는 것이다. 학생들은 그의 강의를 즐기며 주로 다른 짓을 했고 그 역시 강의 시작부터 끝날 때까지 학생들을 쳐다보지 않았다.
그렇게 학교생활을 하던 어느 날 나는 문자 하나를 받았다. ‘50만원 당첨!’ 나는 떨리는 마음으로 그 문자를 보고 바로 전화를 했다. 물론 당첨금을 받기 위해서였다. 그때까지 한 번도 그런 문자를 받은 적이 없었기에 당첨금에 대해 아무런 의심도 없었다. 나는 행운이라고 생각했다. 전화를 하자 어떤 친절한 남자가 전화를 받았다. 전화 속에서 보통 우리가 은행에 가면 들을 수 있는 타이핑 치는 소리가 끊임 없이 들렸다. 그는 내게 당첨금을 계좌로 보내줄테니 가까운 ATM기로 가서 자신이 시키는 대로 번호를 누르라고 했다. 그렇게 하면 당첨금이 나의 계좌로 입금된다는 것이다. 나는 무엇에 홀린 듯 떨리는 마음으로 ATM로 가서 그가 시키는 대로 번호를 눌렀다. 그런데 아뿔싸! 갑자기 통장에 있던 잔액이 0원으로 변했다! 나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사태 파악이 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내게 50만원이 입금된 것이 아니라 나는 그에게 통장의 잔액을 모두 송금해버린 것이다. 그는 바로 전화를 끊었고 다시 연결되지 않았다.
나는 바로 경찰서로 달려갔다. 그리고 한 경찰관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나의 말을 들은 그는 말했다. “세상에 공짜는 없어요! 그 돈은 다시 찾지 못할 겁니다.”
나는 그의 말을 듣고 충격에 빠졌다. 그 통장에 있던 돈은 어학 연수할 때 학교에서 받은 장학금, 대학교에 들어와서 받은 성적 장학금 그리고 집에서 보내준 생활비가 모여진 전 재산이었다. 나는 망연자실해졌고 그 경찰관으로부터 들었던 “세상에 공짜는 없다”는 말은 폐부에 깊숙이 박혀졌다.
그 뒤에 나는 그동안 해왔던 불교 공부와 수행에 대해 크게 회의감을 느꼈다. 나는 그동안 깨달음을 명목으로 수행을 한 것이 아니라 탐진치를 키워온 것이었다. 나의 어리석음을 제외하고 탓할 만한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나는 철저히 실패했다. 불교, 수행, 깨달음, 죽음 등은 모두 관념의 유희였을 뿐 삶이 밑바닥까지 변하지는 못했다. 차라리 세상에 공짜는 없다고 말했던 경찰관이 더욱 깨달음에 가까웠다고 본다. 적어도 그는 인과 즉 원인과 결과의 법칙에 대해서는 알고 있었다.
이 세상 모든 것은 우연히 일어나는 일이란 결코 없다. 모두가 어떤 원인과 결과 즉 조건의 작용이 있다. 이것을 이해하지 못하면 특별한 행운, 우연, 운명을 찾게 되지만 실상은 그런 것이 아니다. 우리의 한 생각까지도 그냥 일어나는 것은 없다. 우리가 그것의 조건을 파악할 능력이 없기 때문에 단독적으로 일어나는 것이라고 착각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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