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보통 선가(禪家)에서 말하는 돈오와 견성 그리고 성불은 비슷한 개념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보통 일반적인 생각으로 부처가 되는 길은 기나긴 닦음의 과정을 동반하는 것 같지만 선불교에서 말하는 부처는 깨달음 또는 깨침을 통해 도달할 수 있다고 봅니다.
인간의 의식의 변용, 의식의 전변이 순간적인 깨침인 돈오에 의해 일어난다고 하니 참으로 매력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너도나도 돈오를 통한 깨달음에 관심을 갖고 있는 듯 합니다. ‘돈오’라는 비약적인 통찰을 통해 고통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다니 많은 사람들의 이목을 끌기에 충분한 주제입니다.
이 문제에 대하여 대답하기 전에 우리의 경험이란 무엇인지 근본적인 질문을 던져야 할 것입니다. 어떤 체험이란 것이 아무런 전제 없이 일어날 수 있을까요? 달리 말하면 어떤 깨달음의 체험이란 것 역시 그러한 체험을 하는 당사자의 세계관, 가치관, 관념 등에 영향받을 수 있지 않을까요? 힌두교인들은 힌두교에서 말하는 깨달음을 체험하고, 기독교인들은 기독교적인 관점에서 체험을 하고, 불교 역시 불교적인 관점에서 체험을 하는 것이라면 우리가 말하는 깨달음 역시 어떤 관점의 투영이 아닐까요? 돈오와 점수, 부처가 되고, 깨달음을 체험하는 것 역시 이러한 주제에 대해 관심을 갖고 있는 사람의 신념이나 관점이 투영된 것이라면 과연 이러한 깨달음을 보편적인 깨달음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요? 그렇다면 깨달음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깨달음이란 어찌 보면 바로 우리의 경험이란 바로 우리의 신념 체계로부터 나온다는 것을 직각(直覺)적으로 깨닫는 통찰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안경의 색깔에 따라 사물을 다르게 경험하는 것을 깨달음이라고 하기보다 바로 그 안경을 벗는 체험 자체를 깨달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본다면 앞에서 말한 돈오는 그 안에 특정한 내용이나 가치가 담겨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선가에서 말하는 돈오는 그것의 내용이 무소득(無所得)입니다. 무소득이기에 점차와 순간, 중생과 부처, 번뇌의 많고 적음 등을 논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돈오’는 바로 그러한 깨달음이 일어나는 순간을 표현한 것이며, 더 나아가서는 깨달음 자체의 성격을 드러낸 말이기도 합니다. 마치 우리가 꿈에서 깨어나면 꿈을 꾼 자와 꿈에서 깨어난 자로 분리되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아무리 오랫동안 꿈을 꾸어도 꿈에서 깨어나는 순간 그동안의 시간성과 공간성은 문제가 되지 않듯 우리의 번뇌 역시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마음공부에서 말하는 깨달음은 돈오의 깨달음입니다. 그렇지만 꿈을 꾸는 자가 꿈에서 깨어나기 전까지 꿈을 실재로 알 듯, 마음의 공성을 깨닫지 못한 자에게는 여전히 번뇌의 경중, 시간성 등이 문제가 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한 번 제대로 꿈에서 깨어나듯 명확히 이해하고, 통찰하면 의식은 질적인 변용을 통해 새로운 차원으로 비약할 수 있습니다.
새로운 차원을 맛보면 우리가 어떻게 괴로움을 만들어내고, 그것을 실재화하는지 또렷이 알게 됩니다. 깨달음이 주는 선물이란 마음의 메커니즘을 통찰하여 괴로움에서 벗어나는데 있는 것이지 그 밖에 다른 것은 없습니다. 진정한 행복은 우리가 생각하는 행복 너머에 있으며, 진정한 앎 혹은 통찰은 우리가 생각하는 마음의 차원을 넘어서 그것을 알아차리는 데 있습니다. 지금 질문자의 마음은 어디를 향하고 있습니까? 지금 이 순간 깨어나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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