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원(西苑)은 남경대학의 외국인 학생을 위한 기숙사이다. 나는 서원의 805호 기숙생이었다.
나는 이곳에서 몇 년간 머물며 박사논문을 마무리했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거의 매일 기숙사 뒤편에서 태극권을 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유학 생활은 그렇게 흘러가고 있었다. 그런데 그 당시 가장 큰 문제는 내가 지내던 기숙사의 방이 북향이라는 데 있었다. 그래서 햇빛을 구경하기가 힘들었고 겨울이 되면 다른 방보다 추웠다. 이런 내게 부러움의 대상은 바로 맞은편 방에서 지내는 학생들이었다. 물론 학교에 요청을 하면 어떻게든 방을 바꿀 수 있겠지만 무엇이든 예측하기 힘들고, 시간도 오래 걸리는 중국의 특성을 감안해 조금 더 상황을 살펴보기로 했다. 그리고 어느 날, 드디어 나는 맞은편 남쪽 방으로 초대를 받아 그곳을 살펴볼 기회가 생겼다.
그곳은 내가 예상했던 대로 따뜻한 햇볕이 드는 쾌척한 방이었다. 그런데 남쪽으로 향해 있는 창문을 열자마자 거리에서 들려오는 온갖 소음과 그리고 냄새가 밀려왔다. 남향의 방에 사는 학생은 자신의 방이 너무 시끄럽고 또 문을 자유롭게 열지도 못한다고 불평을 늘어놓았다. 그리고 나는 그 학생의 불평을 들으면서 내 마음속에서 늘 부글거리던 남쪽 방에 대한 욕망이 이미 사그라들었을 알 수 있었다. 나는 생각했다. ‘지금 나의 방은 비록 햇볕이 들지는 않지만 얼마나 조용한가. 또한 창문도 마음대로 열 수도 있고...’ 그리고 마음이 편안해졌다. 그동안 방을 바꿀지 말지 얼마나 고민했던가. 그런데 문득 마음속에서 질문이 올라왔다. ‘나의 이러한 편안함은 도대체 무엇일까? 지금 나의 상황은 전혀 변하지 않았다. 변한 것이 있다면 나의 생각뿐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마음의 평안은 진실일까?’ ‘단순히 생각을 바꾸어 경험되는 편안함이라면 영원할 수 없다. 다시 어떤 생각이 일어나 그것에 사로잡히면 나의 편안함은 또 깨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상황에 구애받지 않는 진정한 평안함, 고요함이란 무엇일까?’
서원(西苑) 805호에서 바라본 풍경
당시 나는 수업을 들으며 “즉체즉용(卽體卽用) 체용일여(體用一如)”이라는 말을 잘 이해하지 못했다. 그때 노자의 『도덕경』을 공부했는데 그 교수는 노자철학과 선학과의 관계를 연구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중국철학의 기본 입장이 이 구절로 정리될 수 있음을 역설했다. 이 말은 체와 용이 다르지 않다는 말이다. 이를 몸과 몸짓의 관계로 설명해보자. 몸짓을 떠난 몸은 존재할 수 없다. 또한 몸을 떠난 몸짓 역시 존재할 수 없다. 그러나 우리의 이원적 사유는 몸과 몸짓을 구분한다. 그러면서 자신도 모르게 몸짓을 떠난 몸의 실체가 존재한다고 생각하고, 몸을 떠난 몸짓이라는 실체가 단독으로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몸과 몸짓은 상호관계성으로만 존재할 수밖에 없다.
고요함과 시끄러움 역시 마찬가지이다. 고요함은 그것과 상대된 시끄러움을 통해서 고요함이라는 특정 사태가 드러난다. 시끄러움 역시 고요함의 상대적 대비 속에서 시끄러울 수 있을 뿐이다. 따라서 고요함과 시끄러움이라는 이원적 분별의 문제를 초월하기 위해서는 ‘고요함’ 자체에도 집착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나는 갑자기 머리가 맑아지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그 뒤로 늘 머리가 맑은 상태가 유지되는 것 같았다. 그렇다면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이것은 어떤 차원의 전환이다. 나는 어떤 비약적 이해를 통해 새로운 방식으로 사물을 보게 된 것이다. 마치 숨은 그림 찾기를 할 때 숨었던 그림을 발견하게 되면 그 그림을 보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과 같다. 그러나 비약적 경험은 다시 평범함으로 승화된다. 히말라야를 처음 본 사람은 히말라야를 신비하고 아름답게 여기겠지만 히말라야에 사는 사람들에게 그것은 하나의 일상인 것처럼 비약적 경험 역시 사물을 새로운 관점에서 보게 될 뿐 자신이 새로운 관점을 가졌다는 의식 조차 사라지게 되는 것이다.
나는 인간의 생각이 작동하는 방식에 대해 어떤 비약적 이해를 갖게 되었다. 그리고 그로부터 내가 공부하던 선불교가 새로운 시각으로 다가오게 되었다. 선사들의 말은 누군가의 말을 앵무새처럼 흉내내거나 새로운 개념을 창조해서 만들어낸 허구가 아닌 그 자체가 어떤 질적인 비약을 통해 경험된 최초의 일성(一聲) 같은 것이라는 것을.
나는 고요함과 시끄러움에 대한 인식 전환을 통해 우리 눈에 분리되어 보이는 것들이 실상은 분리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선은 바로 이러한 언어들이 삶 속에서 적확하게 표현되도록 도움을 주는 매개가 됨을 알게 되었다. 즉 앎은 삶을 통해 새로운 차원으로 승화되고 그것은 결국 삶을 통해 창조적으로 표현될 수 밖에 없다는 것을.
나는 문득 일어난 이러한 각성이 나의 삶을 움직이는 원동력이 되고 있음을 선명하게 알게 되었다. 고요한 연못에 파문이 하나 생기면 그것이 결국 중중무진으로 퍼져 나가듯 나도 모르게 조금씩 세상을 비이원적으로 바라보게 된 것이다. 어떤 자연스러움 같은 이해가 문득 피어나게 된 것이다.
마음은 인위적으로 멈출 수가 없는 것이다. 만약 마음을 멈추고자 한다면 마음과 싸워야 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마음을 멈추지 않고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그것은 마음을 멈추고자 하는 나와 멈출 대상으로 나누지 않는 것부터 시작된다. 마음을 멈추고자 하는 모든 의도가 사라지면 우리는 마음이라는 흐름 자체가 되고, 흐름 자체가 되면 이원적 분별에 의한 괴로움 역시 생겨날 수 없게 된다. 즉 괴로움 역시 그것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원래부터 괴로움이 없다는 것이며, 번뇌망상 역시 그것을 제어하거나 닦아내는 것이 아니라 번뇌망상 역시 실체가 없다는 것을 깨달으면 되는 것이다. 우리가 겪는 모든 마음의 문제는 그것을 하나의 문제로 보거나 혹은 인식하는 주체 혹은 인식 대상으로 상정하지 않으면 되는 것이지,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 애를 쓰는 순간 문제에 사로잡히게 되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이러한 말이 전혀 의미가 없거나 말이 되지 않는 헛소리라고 생각할 것이다. 나 역시 오랫동안 그렇게 찾고 헤매었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인간의 의식이란 삶에 대한 관찰을 통해 비약적 성찰이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뿐이다. 나는 이것이 우리 삶의 비밀이라고 본다. 비밀을 엿본 사람들은 그것이 비밀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사람들에게 말을 하지만, 여전히 비밀을 찾아 헤매는 사람들은 그것을 무시하고 지나칠 것이다.
삶의 비밀은 이처럼 단순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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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주와 이번 주는 '무분별'을 주제로 공부하였습니다.
교재 <마음공부 열 걸음>의 183~ 201페이지까지의 내용을 여러 번 읽고, 사유하고 직접 해 보시기 바랍니다.다음 주는 생성과 장엄 Becoming and Creation을 주제로 공부합니다.
🧘♀️ 매일 명상
명상하기 위해 고요한 곳을 찾아 헤매지 마세요. 아래 영상을 클릭하시면 님 계신 지금 그 자리가 최고의 마음공부 자리가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