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 속에서 돌이켜 비추기
우리가 수행을 하는 것은 삶을 잘 살기 위해서이다. 수행을 위한 어떤 목적이 있다고 하더라도 결국 그것은 우리의 삶에 대한 대답으로 귀결된다. 우리는 자신도 모르는 방식으로 삶에 질문을 던지고 그것의 답을 찾기 위해 수행과 깨달음의 길에 들어서는 것이다. 육체적인 병듦과 죽음, 그리고 정신적인 회한과 슬픔 등에 맞서 나름의 방식으로 질문하고 그것에 대한 대답을 찾는 과정이 바로 수행이다. 삶에 아무런 문제나 괴로움이 없다고 느끼는 사람은 죽은 사람이거나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다고 본다. 삶을 깊이 느낄수록 우리의 감수성은 더욱 깊어지고 그것은 고통이나 허무함으로 등으로 경험된다. 또한 인간은 아무리 만족스럽고 풍족한 조건에서도 본인의 경험을 벗어나는 새로움을 추구하고 시선 밖의 것을 갈망하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고통이다. 즉 고통은 태생적인 것이며, 원초적인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천연적 굴레 덕분에 알 수 없는 불만족에 직면하고 그것의 해법으로서 어떤 초월을 꿈꾼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오랫동안 ‘깨달음’을 갈망하였고, 어떤 때는 내가 원하는 깨달음에 근접했던 적도 있었던 것 같다. 그렇지만 모든 영적 정신적 육체적 경험은 스쳐 지나갈 뿐 새로운 갈망으로 이어졌다. 물론 어떤 깨달음의 빛 같은 것을 슬쩍 엿본 것 같은 기분이 들던 때가 있었고, 무엇인가 알 수 없는 실체에 다가간 것 같은 느낌도 있었지만 나는 결국 이 모든 것들의 허무를 통해 한발 더 나아가지 못했다.
‘그렇다면 남은 길은 무엇일까?’
단 하나의 길이 있다면 그것은 ‘깨달음’을 포기하는 것이리라. ‘깨달음’이라는 글자를 머리 속에서 완벽히 지워내는 일이다. 궁극적인 길, 초월, 깨달음, 성스러운 삶, 지혜와 자비, 부처, 선(禪) 등의 모든 관념들을 날려버리고 그저 내게 주어진 ‘삶’ 자체를 마주하는 것이리라. 어떤 이름, 신분, 가식, 기억 등을 다 내려놓으면 그대로 드러나는 ‘그것’만이 필요하리라.
중국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나서 ‘삶’에 맞서고자 했다. 그리고 나는 학교가 아닌 한옥학교에 발을 내디뎠다. 그리고 한옥학교에서 대목과 소목을 배우면서 그동안 배우고 수행했던 모든 것을 잊었다. 그리고 나는 더 이상 깨닫지 않기로, 아니 더 이상 깨달음에 매달리지 않기로 하였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이러한 깨달음에 대한 모든 포기가 새로운 통찰의 시작이 되었다.
정말 역설적이게도 그동안 안개에 가려졌던 것들이 서서히 걷어지고 불교 특히 선(禪)에 대한 이치가 분명해지기 시작했다. 그동안 멀게만 느껴지던 선의 어록들과 대승경전들이 새롭게 보이기 시작했고 그것이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지 즉 낙처(落處)가 분명해졌다.
그것은 먼 길을 돌고 돌아 처음 출발했던 그 자리에서 더 이상 여행을 떠날 필요가 없다는 어떤 안도감 같은 것이면서, 마음의 본성에 대하여 더 이상 의심하지 않는 그런 확신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고정된 것이 아니라 삶을 디딤돌로 점점 성장하는 의식의 확장 상태로 이어지기 시작했다. 이전에는 늘 깨어있기 위해 긴장하고 애를 썼지만 자연스럽게 깨어있을 수 있게 된 것이다.
‘깨달음은 찾을수록 멀어진다’는 말이 있다. 이런 말을 들으면 보통 우리는 ‘아니, 찾지 않으면 어떻게 깨달을 수 있지? 도대체 말이 되는 소리인가?’라고 반문한다. 왜냐하면 우리의 생각은 ‘찾음’과 ‘찾지 않음’의 두 가지 길 혹은 그 중 하나를 선택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진정으로 찾지 않음은 ‘찾거나 찾지 않음’이라는 이원적 분별을 내려놓고 한 생각 이전으로 마음을 돌리는 것이다. 한 생각 이전의 마음자리, 그것이 찾지 않음의 영역인 것이다. 이러한 영역은 우리의 의식상에서 묘한 심리상태와 감각 상태를 유발한다. 이것은 마치 하늘을 볼 때, 비록 하늘에 구름이 있어도 구름의 배경이 되는 하늘을 의식하면서 구름을 알아차리는 것과 같다. 바로 의식의 빛을 돌이켜 스스로를 알아차리는 회광반조(回光返照)의 상태이다.
우리의 의식에 대한 일상적 감각이 바뀌면 세상을 바라볼 때 또는 자신을 의식할 때 새로운 관점이 생겨난다. 보통 명상적 알아차림을 훈련하거나 유지하면서 일상에서 일어나는 문제들 예를 들어 분노, 어리석음, 무자각, 과거에 대한 후회, 미래에 대한 망상 등을 대처하지만 본성에 대한 알아차림은 이러한 모든 것을 포함하면서도 우리의 삶 자체를 통째로 통찰 하는 효과가 있다.
나는 이러한 삶에 대한 통찰이 의식의 비약적 활동의 결과라고 본다. 이러한 비약적 경험이 없으면 우리는 수행이라는 미명 아래서 끊임없이 자신을 통제하거나 감독하면서 삶을 살아야 한다.
결국, 명상이나 수행 그리고 깨달음은 ‘삶’을 있는 그대로 마주하는 과정일 뿐이다. 삶을 마주하지 않으려는 수많은 그림자, 환영, 소망, 도피, 좌절 등에서 벗어날 때 드러나는 ‘그것’이 우리를 안심(安心)으로 이끈다. 안심은 ‘마음을 편안하게 하다’는 의미가 아니라 ‘편안한 마음’을 확인하는 과정이다. 만약 이러한 과정을 신뢰하면 우리는 자신과 세계를 좀 더 솔직하고 담대하게 마주하게 될 것이다. 어떤 신비스러운 깨달음의 세계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너무 평범하고 지루해서 마주보려고 하지 않던 삶을 자신의 맨 얼굴로 마주하는 것이다. 여기에 어떠한 신비나 환상은 없다. 그저 그럴 뿐!